‘시간의 사이’라는 말을 만들기 위해 버려지는 시간은 존재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시간의 사이’ 가 되지 못한, ‘사이가 되지 못한 주변’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무언가에 시선을 두는 만큼, 어떤 것에 집중하는 만큼, 바라볼 수 없게 되는 것들은 생길 수밖에 없다. 거기에 시간도 예외일 수는 없다. 특히, ‘사진은 순간의 예술’이라는 통념을 생각했을 때, 과연 그 순간 안에 들어오지 못했던 모든 시간과 장면은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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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사이’를 물리적 형태로 치환할 수 있다면, ‘시간의 사이가 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도 물리적으로 치환이 가능할지 고민해볼 수 있다. 여기서 물리적 형태로의 치환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추상적 개념에 가까운 ‘시간’과 ‘시간의 사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형태로 대신 표현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우리의 시간은 언제나 연속적이지만, 인간의 사고 속에서의 시간은 불연속적인 형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물리적 형태로 치환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 누구도 시간을 연속적 형태로 기억할 수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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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몇 장의 사진을 기록한다. ‘시간의 사이’라는 것을 물리적 형태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개념으로, 두 장의 사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촬영한다.1 첫 번째 사진이 ‘시간의 사이’의 시작점이 되며 마지막 사진이 ‘시간의 사이’의 끝점이 된다. ‘사이’라는 개념을 드러내기 위해 첫 번째 사진의 가운데가 되는 부분을 자른다. 그 빈 공간은 마지막 사진의 동일한 부분이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두 장의 사진이 한 장의 형태로 표현되고, 표면적 의미로 ‘시간의 사이’라는 개념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잘라낸 부분들은 ‘시간의 사이가 되지 못한 것들’, ‘시간의 사이의 주변’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사진들은 구겨져 바닥에 버려진 형태로 전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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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변화를 드러내는 방식의 사진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시간대별로 하늘을 찍고, 한 화면 안에 밤과 낮이 모두 담긴 사진이 가장 적절한 예시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작업은 ‘시간의 사이’를 드러내는 게 주목적이 아니다. ‘시간의 사이가 되지 못한 것들’, ‘시간의 사이의 주변’을 다시 인식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게 버려진 시간은 정말 사이인 시간이 될 수 없는 것인지.
선택받은 대상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이야기 밑엔 늘 선택받지 못한 이들의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더 많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위해, 우리는 때론 모든 중심을 주변화시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주변화는 데리다가 말한 해체와 연결점을 형성하게 되는 지점이다.
아직, 승자들만 남은 역사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런 주변화 작업, 해체이다. 이 작업은 그런 것을 얘기하기 위한 알레고리와 닮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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