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눈이 가장 오지 않는 도시에 살고 있어서인지, 언제나 눈을 갈망했다. 그렇기에 홋카이도행은 인생에서 가장 바라던 것 중 하나였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삿포로역까지의 풍경은 황홀함 그 자체였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과 그 빛을 받고 반사한 하얀 눈이 만들어낸 빛. 이 둘은 서로 같은 듯하면서도 달랐다. 그렇게 3박 4일의 일정 중, 마지막 날엔 홀로 시간을 보내다 적당한 곳에서 커피를 마신 후 오타루 쪽으로 가기로 했다. 오타루행 전철 안에서, 창 너머의 바다와 눈을 보니 문득 내려 걷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전철에서 내려 천천히 주변을 확인했다. 한 정거장 앞이겠거니 했지만, 알고 보니 목적지보다 두 정거장이나 앞서 내린 상황이었다.

그곳은 놀라울 만큼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누구도 밟지 않은 눈이 한가득 쌓여 있었고, 인도마저 제설 작업이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차도와 인도의 경계를 겨우 가늠하며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지만, 사위는 점점 더 어두워졌고 눈도 시야를 가릴 만큼 내리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방수 기능도 이런 눈과 추위에서는 무용지물일 것만 같았다. 지난 며칠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몰아치는 흰 눈과 점점 더 짙어져 가는 푸르스름한 빛.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이 무서웠냐고 묻는다면, 이상하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내 손은 어느새 주변을 담고자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일렁이는 실루엣, 가로등 같아 보이던 하얀 광원, 약간의 명암 차이가 보이는 곳을 향해 사진을 찍었다. 마침 보이는 나무 한 그루를 향해서도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사진을 찍으며 걷다 보니 오타루에 도착했다. 그리고 갑작스레 마주한 엄청난 인파는 마치 날 다른 세계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게 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지나온 곳에서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파도처럼 일렁거렸던 알 수 없는 실루엣은 모두 사람의 그것이었고, 명암 차이가 느껴지던 곳도 그저 바다였다. 또한 한 그루라 생각했던 나무 뒤엔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결국 검은 새가 날아가도, 하얀 배가 지나가도 내가 바라보고자 했던 건 내 시각 너머의 무엇이었다. 마치 눈을 뚫고 날아가는 파랑새의 궤적처럼. 내 눈앞의 존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마냥 쫓아가기만 했던 걸 생각하면 파랑새가 문득 떠올랐던 게 단지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본다는 것이 이렇게나 취약한 감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흐르는 시간과 함께 서서히 변하는 색채 속을 걸으며 과연 사진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삿포로의 경도는 약 141도, 대구는 약 128도이다. 차이는 대략 13도. 그러니 대구와 삿포로 사이의 시차는 대략 50분 정도라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고 있다. 이는 동경 135도 선에 기반한다. 하나의 선을 통해 서로 다른 두 공간의 두 시간대가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지게 된 것이다. 이는 삿포로의 해가 우리나라보다 빨리 진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같은 시간이지만 현실의 일몰은 다르다는 것. 두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50분의 시차를 고려하면 곧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는 현실의 연속적인 공간이 표현하는 시간을 하나의 선을 통해 편의상 불연속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결과 켜켜이 잘린 시간 중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영역으로 숨어 들어간 시간이 발생하게 된다. 우린 수많은 잘린 시간을 잊은 채, 어쩌면 영원히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잘린 시간은 해가 사라질 무렵, 여행자이자 이방인인 우리에게 자신의 미약한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파랑새의 날갯짓처럼 이내 사라져버리고 만다.

무언가를 잊지 않기 위해선 아주 가끔이라도 기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해가 지는 홋카이도의 풍경을 담은 사진을 보며 여전히 떠 있는 한국의 해를 상상해 본다. 사진 속 짙은 색채는 어쩌면 잘려 나간 시간의 일부를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눈을 뚫고 날아가는 파랑새의 궤적을 좇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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